길 하나 사이에 두고…’ 일진 vs SK 말레이시아서 동박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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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4 18:08
SK넥실리스가 경쟁사 일진머티리얼즈의 동박공장이 위치한 말레이시아 사라왁 지역에 같은 공장 투자를 검토하고 있어 두 기업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동박은 구리를 얇게 만든 막으로 배터리 음극재 재료로 쓰인다. 일진머티리얼즈 측은 대기업인 경쟁사와 옆집살이를 하게 될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두 기업은 국내 동박 시장은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든다.
SK그룹 화학계열사 SKC의 자회사 SK넥실리스가 말레이시아 사라왁 지역에 해외 동박공장 건설 추진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 ‘보루네오포스트’는 8월 7일 한국 기업이 말레이시아 사라왁 쿠칭시에 28억 링깃(약 80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놓고 말레이시아 정부와 협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아왕 텐가(Awang Tengah) 말레이시아 도시개발 및 천연자원부 부총리는 투자자와의 화상회의 후 “한국 투자자들이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발표했다.
SK넥실리스가 사라왁 지역에 건설하려는 공장은 2차전지의 핵심 소재가 되는 동박이다. 과거에는 스마트폰 제조사가 동박 제조업체의 주 고객이었으나 최근 전기차 시장의 성장으로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가 주요 고객으로 바뀌었다. 동박 수요도 급증했다. 스마트폰 한 대에 들어가는 동박의 양은 약 4g인 반면 전기차 한 대 생산에 들어가는 동박은 약 40kg인 까닭이다.
국내에선 SK넥실리스와 일진머티리얼즈가 동박 제조 1, 2위를 다투고 있다. SK넥실리스는 SK이노베이션을, 일진머리티얼즈는 삼성SDI와 LG화학 등을 주요 고객사로 두고 있다. 두 기업 중 먼저 해외진출에 나선 쪽은 일진머티리얼즈다. 일진머티리얼즈는 2차전지용 배터리시장 성장에 대응하기 위해 2017년 말레이시아 사라왁에 해외법인 ‘IMM TECHNOLOGY SDN. BHD.’를 세웠다.
문제는 SK넥실리스가 해외 공장 건설을 검토 중인 곳이 일진머티리얼즈 동박생산공장의 바로 옆이라는 데 있다. 업계에 따르면 두 공장은 불과 6차선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SK넥실리스가 최종 결정을 내릴 경우, 중견기업인 일진머티리얼즈 입장에선 경쟁사인 대기업과 옆집살이를 하게 되는 셈이다. 일진머티리얼즈는 온도와 습도 등 기후 조건에 민감한 동박의 불량률을 낮추기 위해 현지에 공장을 짓고도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 쿠칭시 위성 사진. 일진머티리얼즈 공장은 빨간색 부분이며, SK넥실리스가 검토 중이라고 알려진 부지는 파란색 부분이다.
이 때문에 일진머티리얼즈 내부에선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키워온 일진머티리얼즈의 핵심 인력이 대기업인 SK넥실리스 쪽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진머티리얼즈와 SK넥실리스(전 KCFT)는 과거 인력 및 기술 유출 문제로 갈등을 겪은 바 있다. 1989년 일진머티리얼즈가 전북 익산에 국내 첫 동박공장을 준공했는데, 1996년 LG금속이 인근 30분 거리인 정읍에 동박공장을 세우면서 일진머티리얼즈의 핵심 인력 15명 등이 이직하는 일이 있었던 까닭이다. LG금속은 이후 LS엠트론, KCFT를 거쳐 SKC에 인수되며 지금의 SK넥실리스가 됐다.
SK그룹은 그동안 인수합병과 공격적 투자 등을 통해 동박 관련 사업의 몸집을 불려왔다. SK그룹 계열사 SKC는 올 1월 동박제조업체 KCFT의 지분 100%를 1조 2000억 원에 인수하며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 뛰어들었다. 당시 KCFT는 독자 기술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얇은 두께의 초극박 동박을 세계 최장인 30km 길이 롤로 양산화하는 기술력을 보유한 세계 1위 업체였다.
올 4월 있었던 두산솔루스 공개 매각에서도 SKC의 이름은 계속해서 오르내렸다. (주)두산에서 분사한 두산솔루스는 동박과 OLED(유기발광다이오드)를 제조하는 회사다. SKC가 두산 매각 전에 거론됐던 이유는 해외 진출 때문이었다. 전기차와 2차전지는 유럽시장을 중심으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데 당시 SKC는 국내에만 동박공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헝가리에 공장을 보유하고 있는 두산솔루스는 매력적인 인수대상이라는 해석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업계 예상과 달리 SKC는 두산솔루스 입찰에 응하지 않았는데 당시 두산 측이 제시한 1조 5000억 원의 기업가치가 과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 밖에도 SK그룹 계열사 SK(주)가 중국 메이저 동박제조사 왓슨(Wason)의 지분 약 3700억 원을 인수하는 등 SK그룹은 동박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선제적 대응을 해온 바 있다.
이번 논란에 대해 일진머티리얼즈 관계자는 “일진은 온도와 습도에 예민한 동박의 특성을 고려해 4년의 노력 끝에 올해 초부터 동박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SK넥실리스의 공장 준공이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으나 경쟁 관계에 있는 대기업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어서게 되면 중견기업 입장에서 핵심 엔지니어와 기술 유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SK넥실리스 측은 반박했다. SKC 관계자는 “동박 사업은 원가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글로벌 진출이 필수적이다. SK넥실리스는 고객 접근성, 전기요금, 인건비 등 증설 투자에 필요한 조건을 검토하며 글로벌 진출을 적극 검토해왔다. 이를 위해 미국과 유럽 아시아 여러 국가를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고 말레이시아 내에서도 여러 후보지를 검토하고 있다. 해당 부지에 공장을 짓겠다고 투자 결정을 내린 적은 없다”고 밝혔다.
부지 선정 일정에 대해서는 “현재는 제시 받은 조건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중으로 후보지 결정은 이르면 연말에 나올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업계에서는 두 기업의 갈등이 소모적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현재 세계 동박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은 대만의 장춘으로 그 뒤를 일진머티리얼즈와 SK넥실리스가 차지하고 있다. 최근 중국의 왓슨, 일본 후루카와, 니폰덴카이 등의 업체가 국내 기업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리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분야라고 해도 불필요한 갈등은 국내 동박 산업 성장에 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 동박 제조업체들은 계속해서 시장 확장에 나서고 있다. SK넥실리스는 말레이시아 외에도 주 고객사인 SK이노베이션이 위치한 미국과 중국 등을 생산기지로 염두에 두고 있다. 일진머티리얼즈는 유럽 진출을 위해 헝가리에 2만 톤 증설이 가능한 부지를 매입해 공장을 설립할 계획이다. 한편 두산솔루스도 올해 하반기부터 헝가리에 2차전지용 공장 증설을 시작할 계획이다.